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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진짜가 되고픈 욕망

by 올네즈 2025. 11. 20.

성해나 작가의 소설집 『혼모노』는 진짜가 되고 싶은, 혹은 진짜임을 증명해야만 하는 현대인의 뒤틀린 욕망을 서늘하게 포착해낸 작품집입니다.
팬덤 문화부터 인터넷 속의 자아까지, 우리 곁의 가장 날카로운 현실을 통해 '진짜'란 무엇인지 묻는 묵직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진짜가 되고 싶은 뒤틀린 욕망의 민낯을 마주하다

우리는 누구나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원하고, 그 속에서 자신이 '가짜'가 아님을 증명받고 싶어 합니다. 성해나 작가의 표제작 <혼모노>는 이러한 인정 욕구가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발생하는 파열음을 아이돌 팬덤이라는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소재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마음의 크기를 경쟁하듯 전시하며, 그 과정에서 '진짜(혼모노)'와 '가짜'를 구분 짓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혼모노'라는 단어가 주는 이중적인 뉘앙스, 즉 '진짜'라는 사전적 의미와 '광적인 민폐 팬'이라는 은어적 의미 사이의 간극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주인공이 자신의 순수한 애정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검열하며, 끝내 자신의 삶마저 갉아먹는 과정은 섬뜩하리만치 현실적입니다. 이것은 비단 아이돌 팬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직장, 학교, 혹은 SNS라는 거대한 광장 속에서 끊임없이 "나는 남들과 다르다", "나는 진정성이 있다"라고 외쳐야만 생존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 치열한 인정 투쟁의 현장을 감정적인 과잉 없이 건조하고 치밀한 문체로 묘사합니다. 그 건조함 덕분에 독자는 인물들의 뜨거운 광기를 한 발자국 물러서서 바라보게 되고, 그 거리감 속에서 비로소 그들의 욕망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깨닫게 됩니다. 내가 믿고 있는 '진짜'라는 가치가 과연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조작된 허상인지 되묻게 만드는 힘. 이 소설의 첫 번째 챕터가 던지는 충격은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우리는 내 안의 '혼모노'를 마주하고, 부정하고 싶었던 그 날 선 욕망과 눈을 맞추게 됩니다.

타인의 시선 속에 갇혀버린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이 소설집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거대한 줄기는 '보여지는 삶'과 '살아지는 삶' 사이의 괴리입니다. 수록된 단편들을 따라가다 보면, 등장인물 대다수가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이나 가치관을 스스로 정의하기보다, 누군가에게 평가받고 전시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으려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전시주의'와 맞닿아 있으며, 작가는 이를 예리한 메스로 도려내어 우리 눈앞에 펼쳐 보입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관계 맺기의 방식입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깊이 있는 소통보다는 표면적인 연대를, 진심 어린 위로보다는 형식적인 공감을 주고받습니다. SNS의 '좋아요' 개수로 자신의 가치를 매기고,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며 안도감을 느끼는 미묘한 심리 묘사는 읽는 이의 폐부를 찌릅니다. 성해나 작가는 이러한 현상을 단순한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면에 숨겨진 지독한 외로움과 불안을 포착해냅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당당해 보이지만, 속은 텅 비어버린 공허함. 그것이 바로 타인의 시선에 갇힌 우리들의 슬픈 민낯임을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소설이 너무나도 정확하게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연기자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괜찮은 척', '쿨한 척', '행복한 척' 하는 연기 속에서 진짜 내 모습은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작가는 이 소설집을 통해 그 두꺼운 가면을 잠시 내려놓고,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웅크리고 있는 진짜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권유합니다. 그 과정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만이 이 거대한 연극 무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출구임을 역설하면서 말입니다.

허상뿐인 세상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서늘한 질문

『혼모노』가 우리에게 남기는 마지막 잔상은 단순한 냉소나 비관이 아닌, 서늘한 각성을 통한 일말의 희망입니다. 소설집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차갑고 날카롭지만, 그 기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이 깔려 있습니다. 허상과 가짜가 판치는 세상, 진짜가 되려다 오히려 괴물이 되어버리는 현실 속에서도 작가는 인간에 대한 끈을 놓지 않습니다. 비록 그 구원의 방식이 따뜻한 포옹이나 달콤한 위로는 아닐지라도,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명징한 시선 자체가 역설적인 위로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내가 쫓던 '진짜'는 과연 실재하는가?" 어쩌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파랑새를 쫓듯, 실체 없는 '진정성'이라는 환상을 쫓으며 스스로를 괴롭혀온 것은 아닐까요. 성해나 작가는 이 소설집을 통해 허상을 걷어내고 남은 앙상한 현실을 긍정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내가 느끼고 호흡하는 그 순간만이 유일한 '진짜'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이 책은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이들에게 건네는, 차갑지만 가장 확실한 각성제입니다. 무조건적인 긍정이나 힐링 서적에 지친 독자라면, 성해나 작가가 던지는 이 서늘한 질문들이 오히려 가슴 깊은 곳을 울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욕망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단단한 땅인지 아니면 무너져내릴 모래성인지 점검하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혼모노』를 읽는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그 끝에는 분명 한 뼘 더 단단해진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진짜가 되기 위해 애쓰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역설적으로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선사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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